이별, 사랑 그리고 슬픔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 : 김경민 / 포르체
책속에서)
이별의 능력
이별을 겪은 사람은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신의 모든 능력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지쳐버린 상태, 달리 말하면 무소유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그 사람에겐 희망이 있다.
다 비워냈으니 새로 채울 수 있다.
차마 떨치지 못한 절절한 그리움의 토막말은 시간이라는 밀물이 쓸어가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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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애도
망각의 고통이 없는 사랑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죽지 않는 방법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헤어지는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비록 '상처로 기억되는 사랑일지라도' 사랑은 그 소멸까지 품는 것.
그리하여 이 모든 과정을 끝내고 나면
사람은 누구나 사랑과는 이별할 수 있어도
이별과는 이별할 수 없음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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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완성
사랑을 포함해 이 세상 모든 것엔 시작만 있을 수 없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그 끝이 있다.
사랑의 끝은 어떤 모습인가.
가슴을 콩닥거리게 하는 설렘과 정신 차리지 못할 정도의 열정이
사랑의 시작이라면,
그것들이 휩쓸고 간 뒤에 느껴지는 쓸쓸함과 지겨움과 비루함은
사랑의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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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수용으로부터
기다림은 지금 여기에 없는 상대를, 혹은 어떤 기준에 도달하지 않은 상대를
무한 긍정하면서 자신이 그 상대를 아끼고 배려한다는 사실을 만반에 드러내는 것이다.
언뜻 수동적으로 보이지만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튼튼한 지를 세상에 알리는 능동적인 행위다.
사랑은 '사랑해' 같은 말로 증명되지 않는다.
대신 누가 나에게 '천천히 와'라고 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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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믿음으로부터
'사랑은 그가 먹는 모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그 과정에서 그녀를 지탱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믿음이 아니었을까.
상대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상대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상대를 위해 나 자신이 변해야 하는 것은 변할 수 있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하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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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은 결심으로부터
특별한 사건이 없더라도 일상에서조차 상처를 피할 길은 없다.
만일 상처로부터 솟구쳐 오르게 하는 '용수철'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상처의 '화농' 속에서 괴사할 것이다.
용수철처럼 튕겨 오르는, 솟구쳐 오르는 힘이 없다면 과연 생을 지속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 때로는 뛰어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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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슬픔으로부터
행복이 마치 당연히 갖춰져야 하는 기본 상태라 믿는 삶이야말로
불행에 빠지기 쉽지 않을까. 행복은 그냥 행복일 뿐 삶이 아니다.
삶은 어느 정도 불행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자연스럽다.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캔디다>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삶이 행복보다 더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