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인간적인 행위, 돌봄
사랑의 노동 (Labours of love) : 매들린 번팅 / 반비
(책 속)
윤리는 돌봄의 심장이다. 의존성과 취약성과 신뢰, 그리고 부서지기 쉬운 위태로움과 연결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자아와 타인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에 대한 끝없이 되풀이되는 문제인 것이다.
- 셀마 세벤하위선 <시민정신과 돌봄의 윤리>
돌봄은 마치 화폐처럼 지속적으로 돌고 돈다.
이누이트 족은 돌봄을 “미래에 누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도록 과거에 누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했던(혹은 했어야 했던)것에 대한 대가로 지금 누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규정하는 호혜적 균형의 활동으로 여긴다.
(호혜적 : 서로 특별한 혜택을 주고받는 것)
제임스 조이스의 말을 빌리면 돌봄은 ”지극히 섬세하고 찰나적인 순간“이지만 계시와도 같은 기능을 한다. 꼭 새로운 지식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더라도 이미 알고 있었던 무언가의 중요성을 다시금 인식시켜주는 것이다. 딱 맞는 시점에 딱 맞게 내보이는 제스처는 말이 닿을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진실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
한편으로는 돌봄제공자가 그저 물리적으로 곁에 존재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해지는 경우다. 한 지인이 어린 시절 어머니가 다림질을 하는 동안 발치에서 놀았던 생생한 기억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때 돌봄을 받고 있다는 느낌은 거기에 있는 엄마의 존재 자체에서 암묵적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돌봄은 종종 ‘행위’로 이야기되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표현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목격자가 된다.
우리 자신에도 불구하고, 우리 너머의 것에 대해 증인이 된다.
- 제프리 힐
돌봄제공자의 역량은 함께 있어주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는 방법을 알고, 상대의 취약성을 넘어
그가 가진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데 있다.
돌봄제공자의 인생 경험과 세계관 깊숙한 곳에서 끌어내야 하는 감정노동의 한 형태다.
주로 육체적인 노동을 뜻하는 단어, labour.
누군가를 돌봐준다는 것은 대상을 향한 직접적인 행동이고,
꽤 오랜 반복의 과정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혹은 의무적으로만 해서는 오래 버티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사명감이나 소명 의식 같은 책임감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이 노동은 그 바탕에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 배려 같은 기본적인 정서를 필요로 한다.
번역된 책들은 여러 면에서 우리나라 현실과 적지 않은 차이가 있어서
참고로도 하기 어려운 점이 많은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돌봄'이라는 측면에서 공감과 이해를 끌어낼 수 있는 부분이 많고
'돌봄' 자체의 의미와 가치, 더 나아가 방향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서 무척 귀하게 읽힌다.
우리는 누구나 돌봄의 경험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한다.
최초의 경험은 아기 때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로지 양육자의 손길만을 바래야 하는 그 시절.
절대적으로 양육자의 돌봄에 의지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원초적인 경험이 몸속 깊숙이 숨어있다가 어느 순간 누군가에 의해 발현되는 것으로 돌봄은
그렇게 순환되는 게 아닐까.
유년과 노년은 하나의 원처럼 서로 비슷하게 맞물린다.
엄마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이에서 이제 쇠약해진 몸이 된 노인이
가족 혹는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이동한다.
둘 다 연약함을 기반으로 하지만 하나는 처음이고 다른 하나는 끝지점에서
돌봄을 필요로 한다.
누구나 아플 수 있고, 연약해질 수 있지만
노년의 연약함과 돌봄은 몹시 지난한 과정이다.
건강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돌볼 때 드러나는
돌봄제공자의 인간성, 내면의 어두운 면들이
돌봄의 과정에서 넘어야 할 숙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돌봄 화폐제도라든지 돌봄 로봇이 많이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 누구도 하고 싶지 않지만 할 수 밖에 없는 부분들을 로봇으로 대처하는 것은
돌봄 시 발생할 확률이 높은 악마적인 일들(학대, 폭력 등) 사람 간에 불협화음을
다소 완화해준다는 측면에서 매우 바람직하다고 본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성경 속 인간관계의 황금률을 떠올린다. 우리는 언제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지 알 수 없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 갑이고 받는 사람이 을이라는 생각으로
돌봄을 대한다면 결코 아름다운 돌봄의 풍경은 볼 수 없다.
로봇이 인간의 역할 중 많은 부분을 대신한다는 것에 대해 일자리 부족과 같은 네거티브한 것도 있지만
인간이 견디기 힘든 부분을 로봇이 대신하고 그 외의 요소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정서적인 케어를 하게 된다면 균형 있는 돌봄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